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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구한 ‘문경새재 성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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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나라를 구한 ‘문경새재 성황신’

1-문경새재 성황당.JPG

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이만유

 

성황신(城隍神)은 민속 신앙에서 토지와 마을을 수호하는 신이다. 성황당(城隍堂)은 성황신을 모신 당(堂)으로 지역에 따라 서낭당, 서낭신으로도 부르는 데 국어사전에는 서낭당과 서낭신의 원말이 성황당, 성황신이라 한다. 통상적으로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말이라고 하지만, 일부 민속학자는 성황당은 마을 전체가 치성을 드리거나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마을 뒤편에 당집을 지어 신을 모시는 봉안처(奉安處)이고, 서낭당은 마을은 물론이고 불특정 행인들이 소원을 비는 곳으로 고갯마루나 마을 어귀 또는 길섶에 돌무더기, 노거수(신목). 등을 신격화하거나 신이 머물러 있는 곳(거소居所)로 구분된다고 하였다. 필자도 해설이나 강의 시 오래전부터 이렇게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다.

 

귀신(鬼神) 중에는 불러들이는 귀신과 쫓아내는 귀신이 있는데 대체로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나쁜 귀신은 원귀, 악귀, 수살귀(水殺鬼), 달걀귀신 등으로 귀(鬼)로 부르고. 잘 되게 하고 이롭게 하는 좋은 귀신은 성주신(城主神), 조왕신(竈王神), 성황신 등으로 신(神)이라고 부른다. 성황신은 횡액(橫厄)을 막아주고 사람을 지켜주는 신으로 당연히 좋은 신이다.

 

성황당은 지역, 장소, 형태, 성별, 노소 등에 따라 천황당ㆍ국사당, 골맥이, 할미당, 할배당, 각시서낭, 애기서낭, 배(船)서낭, 돌서낭 등으로 부르기도 하며 한 분만 모시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남녀 신을 함께 모시는 곳도 있다. 국사당(國師堂)은 조선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서 도성의 수호신(守護神祠)으로 북악산과 남산에 신사(神祠)을 짓고 무신도(巫神圖)를 모셨으며 특히 남산 신사를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봉하고 호국의 신으로 삼아 개인적인 제사는 금하고 국가의 공식 행사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를 지냈으나 후에는 음사(淫祀)로 규정되어 금지됨에 따라 점차 무속화(巫俗化)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비는 민간 신앙으로 정착하여 일반 백성들의 기도처가 되었다.

 

경북 문경에는 역사가 오래된 옛길 문경새재 제 1관문 주흘관 성벽 뒤에 ‘문경새재 성황당’이 있다. 여기에 모셔져 있는 여신(女神)은 얼마나 영험한지 ‘나라를 구한 성황신’이다. 성황당 보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제 1관문의 축성과 비슷한 시기인 1700년경에 건립하고, 1844년 중수한 것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은 성황당이다. 이곳은 주흘산에서 가장 음기가 강한 곳이라고 하는데 큰 회화나무에 오색천이 둘러있고 항상 나무 위에는 까마귀가 울고 있으며 당집 주변에는 고양이가 웅크리고 있어 더욱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

 

‘나라를 구한 문경새재 성황신’ 이게 무슨 말일까?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큰 공을 세운 최명길(1586~1647)과 문경새재 성황신에 얽힌 전설에 의하면, 최명길이 소년 시절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찾아가는 중에 문경새재에 이르러 깊은 산속을 혼자 걷고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진 뒤를 보니 웬 젊고 자색이 아리따운 여인이 그를 따라오고 있었다. 잠시 뒤 여인이 재빨리 최명길을 앞질러 가는데 뒤태 또한 아름다워 젊은 혈기에 여인에게 말을 붙여 보려고 발걸음을 재촉하였지만,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는데 그만 여인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 하자 최명길이 잡아주면서 동행하게 되었다.

 

길을 가면서 대화하다가 무언가 이상한 느낌이 든 최명길은 호랑이와 산적이 많은 문경새재, 이 험한 길을 여인이 혼자 걷는다? 혹시나 내 간을 빼내 갈려는 천년 묵은 여우가 변한 구미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 듯 스치자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경계하자 이 여인이 눈치를 채고 방긋 웃으면서 “나는 사람이 아니오라 새재 성황신입니다”라고 하였다. 당황하였지만, “지금 어디를 가십니까” 물으니 말하기를 “며칠 전 안동에 사는 모 좌수가 한양에 갔다 오던 길에 성황당에 걸려 있는 비단 치마를 보고 예쁜 자기 딸이 입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보는 사람도 없겠다 얼른 옷소매 속에 치마를 훔쳐 넣고 가 제 딸년에게 주었으니 이런 고약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그 괘씸한 좌수의 딸을 죽이러 가는 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최명길은 그 말에 매우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한척하며 “어찌 그만한 일로 사람을 죽이려고 하십니까?”라고 하며 조심스럽게 “죽이지는 말고 잘못에 대한 벌을 주거나 가져간 치마를 다시 제자리에 갖다 두도록 하겠으니 노함을 거두시고 살려주심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고 말했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최명길은 급히 안동으로 가서 외숙에게 인사만 드리고 서둘러 그 좌수의 집을 물어 찾아가니 집안에서 곡소리가 크게 들리고 좌수의 딸이 영문도 모르게 급사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좌수에게 제가 죽은 따님을 살려 보겠다고 말하고 딸이 있는 방으로 가서 방문을 열고 안을 보니 문경새재에서 보았던 그 여인, 성황신이 누워있는 좌수 딸의 목을 막 누르고 있었다. 보기에는 죽은 것 같지만 아직은 영혼이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최명길이 성황신에게 큰절을 올리고 부디 살려주기를 간청하니 “내 그대의 정성에 감탄하여 청을 들어 주겠오” 하며 이러이러한 일을 하도록 하였다. “예,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하고 나와 성황신이 일러준 대로 좌수에게 말하길 “모월 모시에 문경새재 성황당에서 비단 치마를 가져온 적이 있지요” 하고 물으니 좌수가 놀라며 “그 건 저만 아는 일인데 어찌 그것을 아시오” 하며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했다. 소년 최명길은 의젓하게 위엄을 갖추고 “그것 때문에 성황신이 노하시어 딸을 죽이게 되었소. 백배사죄하고 당장 가져온 비단 치마를 불사르고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 제사 지내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좌수가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거짓말처럼 죽은 딸이 다시 회생하였다.

 

며칠을 쉬고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문경새재를 넘게 되었는데 성황신이 최명길이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새재 입구에서 “이제 오십니까” 하며 웃으면서 맞으며 “후일 그대는 높은 벼슬을 하게 될 것이며 그때 북쪽 오랑캐가 쳐들어와 큰 전쟁이 일어나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다시 말하기를 “전쟁이 나면 절대 맞서 싸우지 말고 화친해야만, 종묘사직을 지키고 백성을 살릴 수 있습니다. 꼭 명심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최명길이 기이하게 생각하면서 집으로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후에 정말로 문경새재 성황신의 예언대로 최명길은 과거에 급제하고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점차 올라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쳐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올랐고, 병자호란을 당하였을 때 조정대신 모두가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는데 오로지 홀로 어려움을 감내하며 성황신의 계시를 따라 주화론(主和論)을 펴 국난을 극복하게 된 것이다. 훗날 역사는 최명길의 화친(和親) 주장이 현명했고 결국 나라를 구하게 되었다. 라고 평가했다. 소년 시절 최명길과 문경새재 성황신과의 만남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어쨌든 성황신의 예언과 계시가 나라를 구하게 된 것이다.

 

‘나라를 구한 성황신’인 ‘문경새재 성황신’은 그 신통력이나 영험함이 특별하여 예전에는 과거 보러 가는 선비가 장원급제를 바라고, 보부상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소원을 빌었으며 지금도 사시사철 전국의 많은 무속인은 물론이고 일반인 찾아오는 기도처가 되었다. 특히 신내림굿이나 기존 무속인들의 신통력이 떨어질 때 기를 받아 이를 복원하기 위해 찾아오신다. 시쳇말로 신통력의 업데이트, 기(氣)의 충전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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